대한제국과 국권 피탈
The Korean Empire and the Loss of Sovereignty
대한제국은 자주독립을 지키려고 무엇을 했고, 왜 끝내 국권을 빼앗겼을까요?
개요
아관 파천 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과 민권을 외쳤고,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했어요.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었어요. 헤이그 특사, 의병, 국채 보상 운동 같은 저항이 이어졌지만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어요.
배경
- 열강의 이권 침탈과 러시아·일본의 경쟁
-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바라는 요구
-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한반도 지배 강화
변화
- 황제국 선포와 광무개혁
- 외교권·군대·국권의 단계적 상실
-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의 확산
주요 연표
- 1896년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어요(아관 파천). 같은 해 서재필 등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만들었어요.
- 1897년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이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8월), 환구단에서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했어요(10월).
- 1898년독립협회가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건의했지만, 그해 말 강제로 해산되었어요.
- 1899년황제에게 강한 권한을 준 대한국 국제를 반포했어요. 광무개혁으로 토지 조사(양전)와 상공업 진흥을 추진했어요.
- 1904년러일 전쟁이 일어났어요. 일본은 한일 의정서를 강요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이용했어요.
- 1905년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빼앗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했어요.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어요.
- 1907년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보냈다가 강제로 물러났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어요.
- 1909년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어요.
- 1910년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해 국권을 빼앗았어요(8월 29일).
지도로 보기
- 한성 경운궁·환구단1897년 대한제국 선포
- 대구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된 곳
- 뤼순1904년 러일 전쟁이 시작된 곳 가운데 하나(러시아 함대 기지)
-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 한인 사회와 의병의 거점
- 하얼빈1909년 안중근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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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용어
- 독립협회
- 1896년에 만들어진 단체예요. 독립문을 세우고 만민 공동회를 열어 자주독립, 민권 보장, 개혁을 요구했어요.
- 광무개혁
- 대한제국이 추진한 개혁이에요.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참고한다(구본신참)’는 원칙 아래 토지 조사, 공장·학교 설립 등을 추진했어요.
- 을사늑약
- 1905년 일본이 군대를 앞세워 강제로 맺게 한 조약이에요. ‘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이에요.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어요.
- 의병
-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스스로 일어나 싸운 민간의 군대예요. 1907년 군대 해산 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며 규모가 커졌어요.
- 국채 보상 운동
- 일본에 진 나랏빚(국채)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 주권을 지키려 한 운동이에요. 금연과 모금에 남녀노소가 참여했어요.
원인 → 결과
원인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면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어요.
결과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해졌고,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고종의 환궁과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졌어요.
원인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미국·영국도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인정했어요.
결과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어요.
원인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어요.
결과일본은 이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어요.
원인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어요.
결과해산 군인이 의병에 합류해 의병 전쟁이 커졌고,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벌였어요.
사료 읽기
‘이날에 목 놓아 크게 우노라.’ 을사늑약 소식을 들은 장지연은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비판하며 나라를 잃게 된 슬픔을 신문 사설로 알렸어요. 이 사설 때문에 황성신문은 한동안 발행이 정지되었어요.
- 이 사설은 누가, 언제, 어떤 소식을 듣고 썼나요? 신문 사설이라는 형식을 고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 사설은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강하게 비판해요. 조약을 강요한 일본의 군사적 위협이나 황제의 책임은 얼마나 다루고 있을까요?
- 사설은 사실을 알리는 기사가 아니라 글쓴이의 의견을 담은 글이에요. 을사늑약이 맺어진 과정을 확인하려면 어떤 자료를 함께 보아야 할까요?
가 볼 곳·볼 것
이 단원과 이어지는 유적과 박물관이에요. 전시물과 관람 조건은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세요.
- 덕수궁 석조전과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
석조전의 대한제국역사관에서 황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중명전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강요된 현장을 함께 보세요.
- 환구단(황궁우)서울 중구 소공동
1897년 고종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로 즉위한 곳으로, 지금은 황궁우와 돌북 등 일부만 남아 있어요.
- 독립문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
독립협회가 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 자리 근처에 세운 문으로, ‘자주독립’이 누구에게서의 독립이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확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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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기
예를 들어 헤이그 특사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려 했어요. 그러나 당시 강대국들은 이미 러일 전쟁 뒤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겨 정식 대표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특사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은 이를 구실로 고종을 물러나게 했어요. 국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라는 벽에 부딪힌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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