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
The Imjin War and the Manchu Invasions
두 차례의 큰 전쟁은 조선과 동아시아의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을까요?
개요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어요. 조선은 초기에 한양을 빼앗기고 선조가 의주까지 피란했지만, 이순신이 이끈 수군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 명의 지원군이 힘을 합쳐 일본군을 막아 냈어요. 이 전쟁은 조선·명·일본이 함께 싸운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고, 전쟁 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으며 명은 크게 약해졌어요. 그사이 만주에서 성장한 후금이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켰고,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뒤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켰어요.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는 1637년 삼전도에서 항복했어요.
배경
-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 정복 계획과 대외 팽창
- 오랜 평화 속에 약해진 조선의 국방 체제와 대비 부족
- 명의 쇠퇴와 여진(후금)의 성장, 명과 후금 사이에서 흔들린 조선의 외교
변화
- 인구 감소와 농토 황폐, 문화재 소실과 많은 백성의 포로 피해
- 명의 약화와 청의 성장, 일본 에도 막부 성립 등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 훈련도감 설치 같은 군사 제도 변화와 청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북벌론
주요 연표
- 1592년일본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공격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한양이 함락되었어요.
- 1592년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쳤어요(한산도 대첩).
- 1593년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되찾았고,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어요.
- 1597년강화 협상이 깨지고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왔어요(정유재란). 이순신은 명량에서 적은 수의 배로 일본 수군을 막아 냈어요.
- 1598년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어요.
- 1627년후금이 쳐들어와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어요.
- 1636년청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일어났어요.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해 맞섰어요.
- 1637년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어요.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등이 인질로 끌려갔어요.
지도로 보기
- 부산진1592년 일본군이 처음 공격한 곳
- 한산도1592년 한산도 대첩
- 평양성1593년 조선·명 연합군이 되찾은 곳
- 행주산성1593년 권율의 행주 대첩
- 명량(울돌목)1597년 명량 해전
- 노량1598년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해전
- 남한산성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한 산성
순서 맞히기
두 전쟁의 사건을 일어난 차례대로 놓아 보세요.
먼저 일어난 일부터 차례로 눌러요. 놓은 카드를 다시 누르면 빠져요. 기록은 저장하지 않아요.
0/4 골랐어요.
핵심 용어
- 의병
-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 싸운 민간의 군대예요. 임진왜란 때 곽재우·고경명·조헌 등이 이끌었고, 휴정·유정 같은 승려도 승병을 일으켰어요.
- 판옥선과 거북선
- 판옥선은 2층 구조의 튼튼한 조선 수군 전함이에요.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덮개를 씌우고 쇠못을 박아 적이 올라타지 못하게 만든 돌격선이에요.
- 중립 외교
- 광해군이 쇠퇴하는 명과 성장하는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실리를 따지려 한 외교 정책이에요.
- 북벌론
-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으려고 청을 치자는 주장이에요. 효종 때 군대를 키우며 준비했지만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어요.
원인 → 결과
원인전쟁 초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크게 밀렸지만, 조선 수군은 남해 바닷길을 지켜 냈어요.
결과일본군은 바닷길로 군량과 병력을 보내기 어려워졌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지킬 수 있어 반격의 발판이 마련되었어요.
원인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와 서인 정권이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멀리하는 정책을 폈어요.
결과후금이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뒤이어 청으로 이름을 바꾼 뒤 병자호란을 일으켰어요.
원인병자호란에서 항복하고 왕자와 많은 백성이 청으로 끌려갔어요.
결과청에 대한 반감이 커져 북벌론이 나왔고, 한편으로는 청을 오랑캐로만 보는 생각이 오래 이어졌어요.
사료 읽기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적은 수의 배로 많은 일본 함대와 싸우기 전날, 이순신은 장수들을 모아 이렇게 다짐하게 했다고 일기에 적었어요. 『난중일기』에는 전투 기록뿐 아니라 백성과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 병과 괴로움도 담겨 있어요. 한 사람이 쓴 일기이므로 명과 일본 쪽 기록, 조정의 기록과 함께 비교하며 읽어야 해요.
- 이 일기는 누가, 언제 쓴 것인가요? 큰 전투를 하루 앞두고 장수들에게 한 말을 일기에 적어 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 대목은 죽기를 각오한 결의를 강조해요. 이 일기에서 알기 어려운 것, 예를 들어 일본군의 사정이나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두려움은 어떤 자료로 알 수 있을까요?
- 그날그날 쓴 일기는 뒷날 쓴 회고록보다 어떤 점에서 믿을 만하고, 어떤 점에서 조심해서 읽어야 할까요?
가 볼 곳·볼 것
이 단원과 이어지는 유적과 박물관이에요. 전시물과 관람 조건은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세요.
- 아산 현충사충남 아산시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과 유물 전시관이 있어, 수군의 활약이 전쟁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떠올려 볼 수 있어요.
- 국립진주박물관경남 진주시
임진왜란을 주제로 한 역사 박물관이에요.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진주성 안에 있었지만 옛 진주역 부지에 새 건물을 지어 옮기는 중이니, 방문 전 위치와 운영 여부를 확인하세요. 진주성도 함께 둘러보면 전쟁을 현장과 함께 이해할 수 있어요.
- 남한산성경기 광주시
병자호란 때 인조가 47일 동안 버틴 산성(세계유산)으로, 고립된 성에서 주화론과 척화론이 맞섰던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확인 문제
0/5 문항을 풀었어요.
생각해 보기
조선 안에서는 이순신이 이끈 수군이 바닷길을 막아 일본군의 보급을 어렵게 했고,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이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을 괴롭혔어요. 밖에서는 명이 대군을 보내 평양성 탈환 등에 힘을 보탰어요. 이 힘들이 합쳐져 나라를 지킬 수 있었어요. 그러나 전쟁 동안 많은 백성이 죽거나 일본으로 끌려갔고, 농토가 황폐해져 굶주림이 심해졌어요.
정답은 하나가 아니에요. 근거를 들어 설명했다면 다른 답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