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
Late Joseon: Reform and Change
전쟁 뒤 조선은 어떤 개혁을 했고, 사회와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개요
두 전쟁 뒤 조선은 무너진 나라 살림을 되살리려고 대동법과 균역법 같은 세금 개혁을 추진했어요. 모내기법이 널리 퍼지고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장시가 늘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널리 쓰였으며, 실학자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할 개혁안을 내놓았어요. 영조와 정조는 붕당 사이의 다툼을 누그러뜨리려고 탕평책을 폈지만, 19세기에는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차지한 세도 정치 속에 삼정이 문란해졌어요. 서학과 함께 들어온 천주교는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고, 1811년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임술 농민 봉기처럼 백성들의 저항도 커졌어요.
배경
- 두 전쟁으로 무너진 토지·세금 제도와 나라 재정
- 모내기법 확산과 상품 작물 재배로 늘어난 생산력
- 붕당 사이의 대립 격화와 왕권의 불안
변화
- 대동법·균역법 등 백성의 세금 부담을 덜려는 제도 개혁
- 장시와 화폐 유통이 늘어난 상품 화폐 경제와 신분제의 동요
- 실학·서학 같은 새 학문의 등장과 19세기 세도 정치 아래 농민 봉기
주요 연표
- 1608년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처음 시행했어요. 100년 뒤인 1708년에는 일부 지역을 빼고 전국으로 넓혀졌어요.
- 1678년상평통보를 나라의 화폐로 정해 널리 쓰게 했어요.
- 1750년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해 백성이 내던 군포를 1년에 2필에서 1필로 줄였어요.
- 1776년정조가 왕위에 올라 규장각을 세우고 탕평 정치를 이어 갔어요.
- 1784년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돌아와 조선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어요.
- 1801년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어요. 정약용도 이때 유배를 떠났어요.
- 1811년평안도에서 지역 차별과 수탈에 맞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어요.
- 1862년진주를 시작으로 삼남 지방 곳곳에서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어요.
지도로 보기
- 한양 창덕궁(규장각)정조가 세운 왕실 도서관·연구 기관
- 수원 화성1796년 완공된 성곽, 세계유산
- 남양주 마재(여유당)정약용이 태어나고 돌아간 집
- 강진 다산초당정약용이 유배 중에 책을 쓴 곳
- 정주성1811–1812년 홍경래 군이 버틴 곳
- 진주1862년 임술 농민 봉기가 시작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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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용어
- 대동법
- 집집마다 지역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을, 가진 토지의 넓이에 따라 쌀·베·동전으로 내게 한 제도예요. 땅이 적은 농민의 부담이 줄었어요.
- 탕평책
- 영조와 정조가 붕당 사이의 싸움을 줄이려고 여러 붕당의 인재를 고루 등용한 정책이에요.
- 실학
-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 한 조선 후기의 학문 경향이에요. 토지 개혁을 강조한 유형원·이익·정약용과, 상공업 발전과 청 문물 수용(북학)을 강조한 박지원·박제가 등이 있어요.
- 세도 정치
- 19세기에 왕의 외척인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차지한 정치예요. 벼슬을 사고파는 일이 늘어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어요.
원인 → 결과
원인공납을 대신 내주고 비싼 값을 받아 내는 방납의 폐단으로 백성의 부담이 컸어요.
결과대동법이 시행되었고,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사서 대는 공인이 등장해 상업이 활발해졌어요.
원인모내기법이 널리 퍼져 같은 땅에서 더 적은 일손으로 더 많이 거둘 수 있게 되었어요.
결과넓은 땅을 경작해 부유해진 농민이 생긴 반면, 땅을 잃은 농민은 도시나 광산으로 떠나 품팔이를 하기도 했어요.
원인세도 정치 아래 벼슬을 돈으로 사고판 관리들이 전정·군정·환곡(삼정)을 이용해 백성을 수탈했어요.
결과1811년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삼정이정청을 두어 수습하려 했어요.
사료 읽기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려 병들어 쓰러져 구렁을 메우는데, 수령이 된 자들은 좋은 옷과 좋은 음식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다.’ 정약용은 신유박해 뒤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며 이 책을 썼어요.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일을 정리하면서 수탈에 시달리는 백성의 모습을 고발했어요. 개혁을 주장한 학자의 눈으로 쓴 글이므로, 관청 기록 같은 다른 자료와 함께 읽으면 삼정 문란의 실제 모습을 더 잘 알 수 있어요.
- 이 글은 누가, 어떤 처지에서 썼나요? 유배지에서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일을 정리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 글은 수령의 욕심과 백성의 고통을 강하게 대비해요. 수령 한 사람의 잘못 말고, 삼정이 문란해진 제도적인 원인은 이 글에서 얼마나 드러나나요?
- 개혁을 주장한 학자의 글이라 과장이 있을 수 있어요. 관청의 기록이나 농민 봉기 때의 자료와 비교하면 이 글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가 볼 곳·볼 것
이 단원과 이어지는 유적과 박물관이에요. 전시물과 관람 조건은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세요.
- 수원 화성경기 수원시
정조 때 1796년 완공된 성곽(세계유산)으로, 거중기 같은 기술과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보여 주는 개혁의 꿈을 찾아보세요.
-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와 실학박물관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과 실학박물관에서 조선 후기 학자들이 현실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했는지 살펴보세요.
-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서울 용산구
교체 전시되는 조선 후기 풍속화와 진경산수화에서 서민의 삶과 조선의 산천에 쏠린 새로운 관심을 찾아보세요.
확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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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기
대동법은 집집마다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을 토지 넓이에 따라 쌀 등으로 내게 해, 방납의 폐단을 줄이고 땅이 적은 농민의 부담을 덜려 했어요. 균역법은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농민의 군역 부담을 가볍게 하려 했어요. 그러나 19세기 세도 정치 아래에서는 벼슬을 돈으로 산 관리들이 본전을 뽑으려고 전정·군정·환곡을 규정보다 무겁게 걷었어요. 제도를 고쳐도 그것을 운영하는 정치가 무너지자 백성의 부담이 다시 커졌고, 결국 농민들이 봉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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